사무엘상 14장 [원귀신을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님의 지배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것뿐입니다]

 




사무엘상 14

 

[원귀신을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님의 지배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것뿐입니다]

 

1절입니다.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사울은 믹마스와 벧엘을 왔다갔다 했고 요나단은 기브아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블레셋이 믹마스를 점령하게 됩니다.

 

2절입니다.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기브아는 게바입니다.

 

3절입니다.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겉옷과 속옷만 입는데 아히야는 에봇을 입은 것으로 보아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아히야는 비느하스의 손자요, 엘리의 증손이었습니다. 요나단이 과감하게 혼자 적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4절입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블레셋으로 가려는 길 양쪽에 험한 바위가 있던 것입니다. 바위는 믿음을 상징하는데 블레셋은 우리 안에 원귀신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귀신도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일곱 족속 귀신은 하나님과 적대적이지만 블레셋인 원귀신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인본적입니다. 그래서 귀신인지 아닌지 헷갈립니다.

 

5절입니다.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6절입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무기를 들고 다녔을까요? 보통은 자신이 무기를 소지하고 싸우는데 요나단은 무기를 든 소년이 따로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무기를 쓰지 않습니다. 일곱 족속은 우리가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지만 원귀신은 무기로 되지 않습니다. 쫓아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블레셋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싸워 줍니다. 요나단 역시 무기를 쓰지 않고 천사를 의지한 것입니다. 수 많은 적군을 대할 때 혼자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도와주거나 축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귀신은 싸우는 내용과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7절입니다.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무기를 든 자는 천사로 이해합니다. 요나단과 사울은 구원이 확정된 자들입니다. 구원이 확정된 자는 원귀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원귀신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일반적으로 전쟁할 때 내가 가서 적장의 목을 베어 오겠다.’라고 하는데 요나단은 건너가서 우리를 그들에게 보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쟁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뭘 보인다는 것일까요?

 

9절입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에게 올라갈 때 적들이 기다려.’하면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반대로 적들이 부르면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원귀신과의 싸움은 특이한데 존재론적 싸움입니다. 원귀신은 축사로 되는 것이 아니고 원귀신이 이미져서 오라고 하면 내가 승리한 것입니다. 의로운 나, 믿음이 있는 상태의 나라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가면 원귀신이 다 죽게 됩니다. 내가 안 싸워도 자기들끼리 싸우다 망하게 됩니다.

 

11절입니다.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원귀신과 내 자아는 원래 구분이 안 됩니다. 함께 공존해 있습니다. 그러다가 원귀신이 올라오면 내가 사그라들고 내가 올라오면 원귀신이 사그라드는 상대적인 관계입니다. 이 원귀신은 나 자신처럼 행동합니다. 이 원귀신은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개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을 방해하는데 구원이 확정된 사람들은 이 원귀신을 제압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구원이 확정 안 된 사람들은 왕에게 붙어야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원귀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원귀신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안 좋게 만듭니다. 특별한 죄가 없는데도 마음이 우울하고 안 좋은 것은 원귀신이 떴기 때문입니다. 축사도 안 되는 그 사람 존재 자체, 개성 자체입니다. 그 사람과 분리가 어렵습니다. 2의 나이기 때문에 싸우기도 힙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아가 바로 원귀신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이 원귀신 이론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원귀신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요? 구원이 확정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며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반드시 사울과 요나단과 같은 구원 확정이 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이 확정된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마음 가운데 편안함이 존재하고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원귀신이 제압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어둠과의 싸움인데 교회에 가면 이 원귀신이 제압되기 때문에, 육신이 생각이 제압되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괴로움은 오번역이고 원어에는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날의 악은 그날로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염려가 어디서 오느냐? 이 염려는 원귀신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늘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원귀신은 나와 유사한 존재로 늘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데 이 원귀신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상대 적군이 자신들에게 올라오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원귀신은 우리와 아주 친합니다. 갈등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곱 귀신은 우리와 갈등이 있지만 원귀신은 나와 아주 친합니다.

 

13절입니다.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간 것으로 봐서 약간 경사가 진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주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내 주인이 되셔서 내가 올라가게 되면 반대로 상대는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이 올라가니까 상대가 그냥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게 됩니다. 아직 죽은 건 아니고 엎드러진 것입니다. 이 때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든 자, 즉 내 안에 성령님께서 원귀신을 압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인이 되시면 내가 영에 속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 안에 원귀신이 제일 뿌리 깊은 귀신인데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령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게 되면 그냥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싸움입니다.

 

14절입니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반나절 갈이 땅1acre(에이커) 정도 되는데 1200평 정도 되는 규모입니다.

두 마리의 황소가 한 멍에에 매여서 땅을 하루정도 갈 양이 1에이커입니다.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쳐죽인 자가 20명 정도 된다는 것입니다.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반나절만 나의 주인이 되셔도 20명 정도고, 하루 정도 주인이 되시면 40명 정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힘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이면 1200명 정도 블레셋, 원귀신이 제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얼마나 성령님에게 붙들려 있느냐에 따라 원귀신의 제압 정도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떻게 원귀신을 제압할 수 있느냐? 내가 얼마나 성령님께 붙들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붙들린 시간만큼 원귀신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기도나 찬양의 싸움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께서 얼마동안 함께 하시느냐의 싸움입니다. 오래 붙들수록 신앙의 굴곡이 없는데 원귀신이 많이 제압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붙들리게 되면 나중에는 염려가 다 사라지게 됩니다. 내 자아인 고집, 염려, 우울감 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15절입니다.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원귀신이 뜰 때 진동이 오는데 실제 땅이 떨리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주관하실 때 저들의 세계에는 지진이 나지만 우리 쪽은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는 평안합니다.

 

16절입니다.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블레셋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원귀신은 우리가 죽일 것이 없고 성령님께서 주인이 되시면 스스로 자멸하게 됩니다. 싸울 필요가 없는 싸움입니다. 축사도, 기도도, 금식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늘 모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원귀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구원과 가장 밀접한 싸움입니다.

 

17절입니다.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점호는 조금 어려운 단어고, 쉽게 말하면 그냥 숫자를 세어서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이 점호를 해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 든 자가 빠진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하나님의 궤는 이동을 많이 했죠. 처음에 실로에 있다가 아벡, 아스돗, 가드, 에그론을 거쳐 벧세메스에 갔다가 이 때는 기럇여아림에 있을 때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궤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궤는 ‘Ark’ , 구원의 방주입니다. 원귀신의 추방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구원은 지적 동의나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내 안에 어둠이 나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19절입니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참된 예배를 통해 블레셋 어둠이 물러가는 과정입니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했는데 아마 제사장이 중보를 했을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 갔으니 이제 그만 하라고 손을 거두라고 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블레셋이 자기들끼리 치면서 크게 혼란이 오게 됩니다.

 

21절입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절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내가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 주변이 다 제압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확정된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까지 다 진멸되는데 우리 안에 있던 인생을 쥐고 있었던 원귀신이 통째로 진멸 당하는 장면입니다.

 

24절입니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사울이 전쟁중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도록 맹세를 시켜서 모든 백성들이 피곤해 합니다.

 

25절입니다.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꿀은 물론 상징인데 우리가 원귀신을 진멸하면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님께서 주인이 되시면 가나안 땅이 되어 우리가 원하는 구원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환상 가운데도 꿀은 영적인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꿀이 나오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달콤하고 기분 좋은 모드가 되는 것입니다. 골방이든 차 안이든 이상하게도 인생이 행복하고 좋게 느껴집니다. 삶의 의욕이 넘쳐납니다. ‘힘드니까 그만 살고 죽어야지.’ 이것은 귀신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원귀신이 제압되면 순간순간이 달콤하고 살 맛이 납니다. 밥을 먹어도 좋고 못 먹어도 좋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사울이 구원확정을 받았지만 지금은 약간 맛이 간 상태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조금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꿀의 세계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달콤한 은혜의 세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환상 가운에 꿀이 있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27절입니다.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요나단은 사울의 맹세를 못 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꿀을 찍어서 먹게 됩니다. 이 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는데 어둠이 제압되면 눈이 밝아집니다. 눈은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면 건강하게 됩니다. 그 건강으로 어둠을 쫓아내게 됩니다. 몸이 안 좋은 사람도 있는데요? 그것은 일곱 귀신이므로 따로 싸워야 합니다. 지금은 원귀신에 관한 내용인데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28절입니다.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사울과 요나단 둘 다 구원을 확정받은 사람인데 요나단이 조금 더 영적으로 강한 것입니다. 똑같이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 상태가 안 좋은 것입니다. 반대로 요나단 같은 경우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구원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내면적 기쁨이 중요합니다.

 

29절입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30절입니다.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탈취물이 오고 꿀이 옵니다. 이것을 누리는 것은 승자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31절입니다.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원귀신을 제압하는데 100% 다 제압시키지는 못합니다. 완전한 축사나 제압은 없습니다. 그래도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어둠들이 상당히 제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2절입니다.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양과 소와 송아지들, 그리고 피째 먹었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할까요? 신앙과 자연계는 연동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잡아 피째 먹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복으로 인해 ,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귀신이 제압되어서 평안이 오고 몸도 건강해지는데 이 때 물질적인 복이 와서 죄를 짓게 되는 경우입니다. 돈과 신앙은 상당히 유착관계가 깊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돈이 많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진리 가운데 있을 때에는 진리 안에 있지 못할 때보다 더 유복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오히려 진리 안에 있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물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물질적인 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때 피째 먹는 행위즉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3절입니다.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

로 굴려 오라 하고

 

34절입니다.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소는 구원받은 자가 받게 되는 물질의 복을 상징하는데 지금 사울이 백성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소를 제단으로 가져와 그곳에서 잡도록 한 것입니다. 물질의 복이 왔을 때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죄인데 개인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제단, 즉 교회로 가지고 나오도록 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35절입니다.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36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절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울이 블레셋을 추격할지,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케 하실지를 물었지만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사울이 믿음이 약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뜻이 있으시고 답이 있으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답이 없다? 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으시지만 지금 상황은 답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대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38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절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사울이 지금 하나님께서 답이 없으시자 누구 죄 때문인지 찾고자 합니다. 실은 자신의 죄 때문인데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40절입니다.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절입니다.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제비를 뽑았는데 백성은 안 걸리고 사울과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42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이 일이 정말 요나단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미혹입니다. 요나단은 죄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비를 통해 알려 주시기도 하시지만 지금은 미혹입니다. 사울이 맛이 가서 자신의 죄 때문인데 요나단에게 덮어 씌우게 된 것입니다.

 

43절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절입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백성이 요나단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사울의 제비뽑기가 미혹된 것이고 응답 못 받은 것은 사울의 죄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죄가 없습니다.

 

46절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절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영토 확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48절입니다.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은 구원확정을 받은 왕으로서 구원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49절입니다.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절입니다.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절입니다.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절입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사울이 승리한 이유는 싸울 때 주변에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불러 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다 약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만드셔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마치겠습니다!

 

jaegap3366@gmail.com

jaegap33@naver.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열왕기상 1장 [하나님이 세우시는 영적인 순서는 하나님이 직접세우는 선지자가 첫째이며 선지자가 세우는 제사장이 둘째이며 선지자제사장이 세우는 왕이 셋째입니다]

사무엘하 23장 [영력은 어둠(마귀)를 쫓아내는 힘인데, 영력만큼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으며, 다윗은 37명 용사들과 70만명을 인도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6장 [하나님 뜻으로 세워진 성전은 구원방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면 무너지며 성소는 temple로 구원받은 자들 모임이며 지성소는 영생의 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