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3장 강해-[요단을 건너는 구원은 일곱귀신을 쫓아내는 출발입니다]
여호수아 3장
[요단을 건너는 구원은 일곱 귀신을 쫓아내는 출발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1~17절)
1절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싯딤을 떠나 요단 근처에서 3일정도 유숙하게 됩니다.
2절입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면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 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이천 규빗은 약 1000m정도 됩니다. 왜 멀리 떨어져서 가라고 했을까요? 너무 가까우면 멀리서는 잘 안 보입니다. 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전체가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전에 가 본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 볼 수 있게 해서 행할 길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백성들이 어떻게 자신을 성결케 할까요? 목욕하고 손을 씻는 겁니다. 영적으로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씻어야 할까요? 모든 성령의 역사는 성결을 기반으로 합니다. 죄를 사함 받는 것이 모든 성령의 역사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씻는 겁니다.
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제사장들은 곧 목사들을 의미합니다. 목사들이 언약궤, 즉 구원의 방주를 멘 것입니다. 그 뒤를 성도들이 따라 가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모세가 왜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왜 세우셨을까요? 모든 세우심은 구원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호수아 너를 세울 건데 구원 때문에 너와 함께 하고 너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합니다.
8절입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오번역입니다. 처음에는 물에 안 들어가고 물가에 이르게 됩니다. 한 동안 물가에 서서 머무르게 되는데 요단에 들어서라는 것은 오번역입니다.
9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절입니다.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일곱 족속입니다. 하나가 빠졌죠. 블레셋 족속입니다. 일곱 족속은 쫓아낼 수 있는데 블레셋은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싸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어둠이 추방되게 됩니다. 한번에 전부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으면 행복해 지고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이 마귀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절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이스라엘 지파 중에 열두 명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순간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세우시는데 이것이 복입니다.
13절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14절입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절입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밀을 거둘 때라서 물이 충만한 때입니다. 밀을 수확할 때는 바로 칠칠절입니다. 거듭남은 유월절, 즉 홍해를 건너는 것이고 구원은 칠칠절, 오순절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은 구원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성령세례, 은사, 성령 강림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상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120명이 오순절 구원을 일찍 받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복음전파자가 된 것입니다. 밀 수확, 즉 오순절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장절, 초막절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총 3가지인데 유월절인 거듭남과 칠칠절인 구원과 수장절인 영생입니다. 곡식 거두는 시기는 물이 항상 넘처 흐르는 시기입니다.
16절입니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고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성읍 변두리에 쌓인 것입니다. 아담 지역은 여기서 처음 나오는데 왜 아담이라고 했을까요? 구원은 아담에서부터 나온 인간의 근본적인 죄의 뿌리가 뽑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성이 있습니다. 그 죄성이 뽑히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인간의 정신세계가 뿌리 채 바뀝니다. 사고가 바뀌는 것인데 사고체계가 다를 때 서로 대화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을 때 아담의 정신세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모든 사고가 하나님 중심인데 구원 안 받으면 사단 중심입니다.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인간의 사고방식 체계는 근본이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세속과 하나님 세계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세속은 항상 영광을 구하지만 우리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를 구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과 모든 것이 안 맞고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염해는 에덴동산이 있었던 자리이며,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과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따르면 마귀를 따르는 것인데 마귀와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리고는 가나안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 된 곳이고 지금도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며 가장 인본적인 곳입니다. 인본적인 세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구원은 인본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본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사고가 확 바뀌게 됩니다. 사람은 이 생각하는 사고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울고 웃는 이유가 바뀌게 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기뻐하고 못 벌면 슬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으로 울고 웃습니다. 인본이 완전히 변한 결과입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다 건널 때가지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사장들, 즉 목사들이 앞장섰고 이제는 백성들이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되기를 원하지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이런 고난을 감당해야만 그 다음에 복음전파를 통해서 구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당연히 십자가는 필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지만 이것을 통해서 누군가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는데 이 때 영광은 세상 영광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누군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내게 영광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이고 고난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통해 누군가가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영광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영광이 아니라 영적인 영광입니다. 나의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누군가가 구원받는 것 자체가 영적인 쾌감이요, 영광입니다. 고난 없이는 절대 구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목사는 이 고난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제사장은 언약궤, 방주를 메고 백성들이 완전히 다 건널 때까지 서서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가슴 떨리고 두려웠을까요? 옆에 쌓여 있던 물이 언제 덮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감사해야 하는데 나의 이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학은 고난을 이해할 때 죄로 인한 것으로 알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고난이 오는 이유는 복음전파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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