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3장 [직통계시(하나님께 묻고 바로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 대화기도)는 안정적인 정확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사무엘상 23

 

[직통계시(하나님께 묻고 바로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 대화기도)는 안정적인 정확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1절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그일라는 블레셋 접경지역인데 블레셋이 타작마당에 쳐 들어 온 것입니다. 타작마당은 천국과 지옥을 선포하는 구원의 장소입니다. 마지막 타작마당에서도 영적 싸움이 있는데 여기서 지면 지옥입니다. 그일라가 막판에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2절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도 지금 쫓기는 몸인데 구원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직통계시를 무조건 이단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성경에 대한 모독입니다. 직통계시는 구원을 얻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계시는 그냥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 직통계시는 내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답이 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통계시를 사람들이 많이 오해 하는데 일반 계시와는 달리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다 경험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참 기독교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답을 얻는 이 직통계시는 지금도 존재하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물음에 답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이 없이 영원 속에서 존재하십니다. 영원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어느 한 시점에서 우리가 묻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물론 때로 답을 안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통계시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께 답이 왔을 때 어떤때는 황당하고 상상을 초월한 답변이 오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지금도 다윗의 질문에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고 구원하라고 답을 주셨습니니다.

 

3절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하나님의 답변을 전달하자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다 반대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화내지 않고 하나님께 다시 물어봅니다.

 

4절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는데 두 번째는 그일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똑같은 것을 물어도 답이 다릅니다. 물론 의미는 같다 할지라도 내용의 표현이 다릅니다. 직통계시의 위험성이 있는데 그 답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자기 생각인지 구별을 못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가 임할 때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면 자기 생각이 섞인 확률이 높습니다. 답변의 내용은 같은데 표현과 뉘앙스가 다 다릅니다.

 

5절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구원을 받았지만 영생을 누리지 못하도록 마귀가 역사하는데 그 마귀를 쳐서 이기고 그 영혼을 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6절입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제사장 85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올 때 에봇을 챙겨 왔습니다. 이것을 구원을 잃지 않고 유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7절입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사울이 알게 됩니다. 이 때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셨다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냅니다. 내가 만든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참신앙은 모든 것의 출발이 하나님에게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직접 와야 하는데 직통계시가 있는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반대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다윗을 넘겨 준 것이라고 자기 혼자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왔느냐, 자기에게서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8절입니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9절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이번에도 하나님께 물어보는데 이번에는 에봇을 입고 물어봅니다. 제사장이 옆에 있는데 왜 다윗이 입었을까요? 다윗이 오버하는 것은 아닐까요? 직통계시가 임했다는 것은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감동으로 오는 일반계시는 많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내가 묻는 모든 것에 응답이 오는 직통계시는 구원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50, 40, 10명이 있으면요? 이것이 직통계시입니다. 이것은 구원 밖에서는 절대 안 일어납니다. 발람에게도 계시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온 음성입니다. 직통계시에서는 대화가 가능한데 구원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수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묻고 답을 듣는 생활을 다윗은 오랫동안 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절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넘기고 사울이 다윗에게 내려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 막아 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본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요청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의로 행하십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대로 행하십니다. 여기에 순종하고 반응하는 것이 참신앙이지,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인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혹은 죽게 하신다라고 하실 때 반응하고 순종해야지 거기에 대해서 나의 뜻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망하거나 죽거나 안 될 수도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바 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면 끝난 겁니다. 천국과 지옥도 하나님이 주권자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12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의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는지는 물어볼 때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보호해 줄게.’가 아니라 그들이 너를 넘기기라.’입니다. 괜히 물어본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전능하시니까 제발 좀 사울을 물리쳐 주세요!’라고 탄원할텐데 이것이 인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하십니다. 그일라 사람들에게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넘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때 , 넘기시는구나.’하고 그대로 앉아서 당해야 할까요? 중요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도망가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말씀을 하실 때 현재 상태가 그렇다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도망가면 넘겨짐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운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우리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다 해결해 주세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십니다. 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망가면 됩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을 때 시험에 들면 안 되고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그일라에서 도망친 것을 알게 된 사울이 쫓아가는 것을 멈춥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틀린 것일까요? 그일라 사람을 통해 사울에게 넘겨진다고 하셨는데 그대로 안 되었네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도망치지 않았을 경우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를 이해할 때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당시 현재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연출해 나가십니다. 다윗이 도망갔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대로 있었으면 사울에게 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이시지만 우리의 상황이나 행동에 따라 가변적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의 가변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네가 3일 안에 죽으리라.’는 말씀을 받았을 때 간절히 애통으로 회개하면 3일이 지나도 안 죽게 됩니다. 반대로 죽는다는 말씀을 받고서도 그대로 있으면 진짜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에 따라 바꾸시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상태가 그렇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15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절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절입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지금 요나단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면서 네가 이스라엘 왕이 되고 그 다음에 내가 왕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라고 말해 줍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요나단이 왕이 안 되었는데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것이 다윗과 요나단의 신앙의 차이입니다. 다윗은 직통계시에 깊은 사람입니다. 요나단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만약 이 때 요나단이 영적으로 한 수 위인 다윗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 봤다면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더 영적으로 하수인데 물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말한 것이지만 왜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인본적인 용기를 주는 말에 불과합니다. 아직은 요나단이 인본적인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임한 계시를 인정하고 물어 보았다면 요나단도 더 오래 좋은 결과들을 맺으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왕 사는 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오래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요나단이 지금은 다윗보다 상황이 더 좋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고 오히려 용기를 줄 생각으로 말한 것입니다. 상황이 더 좋다고 영성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이 어느정도 마음에 교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절입니다.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21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긍휼은 오번역이고 ‘compassion’입니다. 동정입니다. ‘너희가 나를 동정했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아라.’ 사울은 스스로가 대단히 여겨 나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동정했으니 복을 받으라.’하는 것입니다. 교만의 끝이 없습니다.

 

22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절입니다.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절입니다.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절입니다.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마온 황무지는 숲이 없고 황폐한 곳입니다.

 

26절입니다.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마온 민둥산에서 사울이 쫓아 가는데 다윗이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상황입니다.

 

27절입니다.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다윗을 잡기 직전인데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물러갑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로 이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나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을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겠지 하며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거야.’하고 약도 안 먹으면 그대로 죽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도 있지만 이것만을 기대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다윗의 경우처럼 늘 하나님께 묻고 답을 얻고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이러한 직통계시가 존재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직통계시를 이단시하여 참된 기독교가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늘 직통계시로 하나님께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이 직통계시를 믿어야 하는데 단지 내가 그 상태까지 안 되었기 때문에 받지 못할 뿐입니다. 혹은 가짜인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존재하는데 가짜가 훨씬 많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직통계시는 신앙이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 안에 있을 때 직통계시가 임하면 신앙의 참 맛이 있습니다.

 

28절입니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절입니다.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신기하게도 왜 다윗은 멀리 도망가지 않고 유대에만 머물러 있었을까요? 구원 안에 있을 때 구원을 위협하는 환란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이 늘 구원을 방해하려고 공격합니다. 유대를 떠나 멀리 가면, 즉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면 마귀도 더 이상 안 쫓아 옵니다. 구원은 항상 위기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사울이라는 존재가 늘 쫓아오는데 성공한 경우가 바로 오늘의 다윗입니다.

 

구원은 면류관이 아닙니다. 이미 따 놓은 것이 아니라 늘 지켜야 하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면류관도 뺏기기도 합니다. 신앙은 계속 바뀌고 가변적인데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받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도 엄청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구원을 확정받고서도 계속해서 구원을 유지시켜서 이탈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마치겠습니다!

 

jaegap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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