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7장 [이성에 대한 탐심 곧 아스다롯이란 우상을 무너뜨려야 원귀신이 약해집니다]

 



사무엘상 7

 

[이성에 대한 탐심 곧 아스다롯이란 우상을 무너뜨려야 원귀신이 약해집니다]

 

 

1절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옮겨는 오번역입니다. ‘fetched up’인데 잡다라는 뜻입니다. 지난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다 죽으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잡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에브라임 산지인데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한 자를 구별한 것입니다.

 

예배 인도자의 조건은 거룩입니다. 예배 인도자가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방주안에 있다 하더라도 인도자가 거룩하지 않으면 임재가 없습니다. 반대로 거룩하지 않은 자가 인도하면 사단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임재 가운데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기럇여라림에서 20년간 머물게 되는데 꽤 오랜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사모는 오번역이고 ‘ lamented’인데 애통하다라는 뜻입니다. 임재는 손이 뜨거워지고 방언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이 없는 현상은 임재가 아닙니다. 애통이 임재의 현상인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임재가 오면 내 죄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영의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눈물이 나고 마음이 힘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애통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사나 병고치는 것이 아니라 애통입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면 무조건 애통이 일어납니다. 선지자는 죄인에게 하나님의임재가 오게 해서 회개케 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임재를 오게 하는 자인데 대환란 시대에는 선지자도 없고 임재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에 미혹되어서 예배가 미혹되게 됩니다.

 

애통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고, 애통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대부분 애통을 한 6개월 정도 하다가 그만 둡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아 있는 한 애통은 계속 존재합니다. 오늘날은 애통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임재해 오시면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애통은 이 세상에서 느끼는 지옥의 고통입니다. 세상 불신자들은 이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이 고통을 느낍니다. 이 영적인 고통 때문에 바닥에서 구르기도 하고 오열을 하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우상들입니다. 아스다롯은 에로스를 의미합니다. 에로스는 우리 마음의 신인데 연예의 신입니다. 마음에서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공경하는 것인데 결국은 음행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대할 때 나는 저런 거 없는데...’ 할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는 우상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건전합니다. 누가봐도 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가 됩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극에 달합니다. 이러한 아스다롯 우상이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와도 마음이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우상 때문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부인입니다. 아스다롯의 어머니는 아세라입니다.

 

이 아스다롯은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거하고 이혼하고 재혼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아스다롯 때문입니다. 점점 이 세상은 아스다롯이 많아져서 연예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냅니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계속 연예질을 합니다. 이성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이 부분이 회개가 되지 않으면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 연예 귀신이 사라져야 합니다. 아니면 구원이 어려워집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우상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어떻게 이 우상들을 없앨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연예의 신들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이 아스다롯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우상들을 내면에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 내면 세계를 알려주어 우상을 버리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4절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바알은 뭘까요? 축복이나 성공이나 형통을 바라는 것이 바로 바알입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잘 하는 것이 인간의 바램입니다. 인간에게는 아스다롯과 같은 연예의 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고 또 한 쪽은 성공과 축복을 바라는 바알의 신을 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목사들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음에도 축복을 바라고 부흥을 꿈꿉니다. 소원성취를 꿈꾸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바알입니다. 이 바알이 무너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바알이 없어지면 인생에서 불행이 힘들지 않습니다. 바알을 섬기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성공과 축복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다 바알신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면 축복과 성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공격을 당하게 된 이유가 바알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우리 안에 축복을 원하는 마음과 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구들을 제거하는데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우상들을 제거하게 되면 자유함이 오게 됩니다. 우상을 원해서 막상 우상이 오면 행복하지 않지만 반대로 우상들을 다 제거하면 참 행복이 찾아옵니다. 어렵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나요?’라고 말합니다. 하루하루 밥 머고 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뭘 해야겠다, 나중에 뭐가 되어야 겠다, 이런 야망들이 다 사라져야 합니다. 이러한 욕망들이 다 사라지면 자유함이 옵니다.

 

5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절입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물은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데 여호와 앞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애통이 임하면서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상을 부술 때 옵니다. ‘그 날 종일 금식하고욕구가 사라지면 먹는 것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애통할 때는 밥이 잘 안 먹힙니다. 잘 먹는 것보다 애통이 훨씬 건전한 생활입니다.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드디어 죄에 대해 제대로 된 고백이 나옵니다. 죄는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행실은 같아도 하나님의 분노와 죄의 정도는 비례합니다. 하나님께서 열 받아 하시면 죄가 큰 겁니다. 겉으로 볼 때 커 보여도 하나님께서 열 안 받으시면 죄가 작은 겁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은 죄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으십니다. 불신자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성령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고통을 안 느끼시지만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너무 힘들어 하시고 아파하십니다.

 

교회의 역할은 이러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힘들어하시고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열 받아 하시고 고통을 받으시면 나중에는 결국 버리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정말 버리실까?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못 견뎌 하십니다.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나중에는 결국 내 안에서 이탈하십니다. 이것이 구원 상실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사기 친 것도 아니고, 거짓말 한 것도 아닌데 회개할 것이 뭐가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회개할 것이 엄청 많습니다. 특히 우상 부분에서 엄청 많습니다. 사람들이 회개가 안 되는 이유는 이러한 우상들을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우상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부숴야 합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다스리다는 오번역이고 ‘judged’입니다. 판결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문제와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평가를 알려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하루에도 이러한 판결을 여러번 합니다. 성도님들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을 주어서 결론을 내려 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죄를 회개시켜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지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 가운데 쯤 위치하는 곳인데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원귀신인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합니다. 지금 이 전쟁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영적 전쟁을 의미합니다.

8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지금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람들을 미스바로 모은 뒤 전체가 부르짖는 기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기도하겠다라고 말합니다. 희한한 기도회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무엘도 혼자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백성들도 사무엘에게만 중보 기도를 부탁합니다. 영적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아닙니다. 영적 싸움에서 예배 인도자의 영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좌우합니다. 개인 영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원귀신인 블레셋은 보통 사람들이 이기기 힘듭니다. 인도자가 어둠들을 제압시켜야 합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키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다 죽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서 목자가 엄청 중요합니다. ‘아무교회나 가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은 엄청 위험한 생각입니다. 목자가 죄에서 못 벗어나면 성도들도 절대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사무엘이라는 대선지자가 양들을 위해서 대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젖 먹는 어린 양어린 양은 속죄제, 화목제 등에 많이 쓰이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린 양은 ‘sucking lamb’으로 젖 먹는 어린 양인데 아주 드문 것입니다. 많은 동물 중에 왜 이 젖 먹이 양을 바쳤을까요? 아마도 젖 먹이 어린 양이 제일 맛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가장 좋아하는 것, 가장 맛있는 것이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이 바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상은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자들은 야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즐기고자 합니다. 여자들은 성공과 축복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공한 남자들을 좋아합니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우상이 있는데 이 좋아하는 것을 다 제물로 바쳐버려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좋아합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우상을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마음에서부터 없애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금욕과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밥을 안 먹으면 성욕이 사라집니다. 금식하면 육은 힘들어도 영은 좋아집니다. 축복은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좋아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상을 버리면 영이 좋아지는데 지금 사무엘이 가장 맛있는 젖먹이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10절입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큰 우레는 천둥소리인데 우리 안에 원귀신 블레셋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요?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귀들이 무서워합니다. 내가 온전한 예배로 내 안에 욕망들을 죽일 때 하나님께서 내시는 소리를 블레셋이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들이 듣고 어지럽게 될 때 우리는 내 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슬퍼할까요? 내가 잘 되어야 하는데 잘 안 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욕망들이 없으면 슬플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 뿌리가 욕심에 있는데 이것이 사라지면 원귀신의 세력이 힘이 약해집니다.

 

11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절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돌은 골짜기에 있었을텐데 미스바와 센 사이의 골짜기 돌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영적으로 회복하도록 도와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도움입니다. 마음에 욕망이 사라지고 원귀신이 약해져서 구원이 가깝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점점 더 좋아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확정하시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신앙은 다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저희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특별히 다루시고 훈련하시는 곳입니다. 이 마음이 중요한데 마음에서 원귀신의 세력이 약해져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큰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은 외부적인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구원 확정을 받게 하는 것이 큰 역사입니다.

 

13절입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이것은 참된 예배 인도자가 다스릴 때 원귀신의 세력이 제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연예의 신이나 축복의 신을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로 마음의 즐거움과 행복이 자연적으로 오게 됩니다.

 

14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원래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블레셋이 다 먹었었는데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아모리 땅은 원래 단 지파가 살고 있었는데 단 지파가 떠나면서 나중에 블레셋이 점령하게 됩니다. 이 지역이 다시 회복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모리와 원귀신이 둘 다 존재하는데 이 중에 원귀신을 제압하면 일곱 족속 중 아모리도 쉽게 이기게 되어 병도 안 생기고 싸울 일도 없게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서 회복된 이후로 일곱 족속과 싸우는 내용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15절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절입니다.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는 영적인 도시들입니다. 사무엘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며 다스렸습니다.

 

17절입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은퇴하고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어떤 제단을 쌓았을까요?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를 인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없는데 제단을 쌓은 것이 잘한 것일까요? 과거에 동편 사람들이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막이 있는 장소 외에서는 제단을 쌓으면 안 됩니다.

 

예배는 내 마음대로 드리면 안 됩니다. 지금 사무엘의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나중에 사무엘의 자식들이 잘못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왕을 구하게 됩니다. 나 자신이 예배 인도자로 충만하다 할지라도 계속 잘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인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와 바른 인도자가 필수입니다. 예배 인도자는 함부로 변경하면 안 됩니다. 예배는 아무나 인도하면 안되고 아무데서나 인도해도 안 됩니다. 예배가 망하면 교회가 망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 지옥 갔습니다. 사무엘이 이 때 제단을 쌓은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 기럇여아림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붙었어야 합니다. 왜 고향인 라마로 내려가서 거기서 제단을 쌓습니까? 사무엘의 실수였습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데 사무엘의 잘못된 예배로 자녀들과 후대들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배가 제대로 되었다면 자녀들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고 사사로 이어 갔을 것입니다.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는 임재가 있는 장소에서, 세운자가 인도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쉽게 드리거나 아무나 드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블레셋, 원귀신을 이겨야 하는데 이러한 영적인 세계를 알려 주는 자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또다른 사무엘이 나와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않으면 후대는 무너지게 됩니다. 선지자가 있어야 안 망하는데 선지자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말씀과 기도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만나서 선지자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jaegap33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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