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장 [구원받을 때 귀신들 일부를 우리 안에 시험하는 자로 남겨둔 것입니다]
사사기 2장
[구원받을 때 귀신들 일부를 우리 안에 시험하는 자로 남겨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사자’는 천사를 말합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가서 처음 선점한 땅이었습니다. ‘보김으로 올라와’ 보김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실로와 벧엘 사이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모든 땅과 지역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2절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언약’은 'League'입니다. 연맹하다, 동맹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족속과의 동맹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귀신과의 동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쫓아내야 할 귀신과 같이 연합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귀신들도 섬기는 제단이 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배하다의 넓은 개념입니다. 내 안의 영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지만 내 안의 귀신들은 마귀들을 섬기게 합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원래는 귀신들을 쫓아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쫓아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귀신들 때문에 늘 시험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옆구리에 가시가 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이방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12지파 중에 유다지파만 쫓아냅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우는데 좋은 반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흐느껴 울어야 합니다. 여전히 죄 아래 있고 죄가 수시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후에도 입술로, 눈으로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런데 눈물이 말랐다? 눈물이 없다? 끝난 겁니다. 우리 인간은 늘 죄 아래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늘 눈물이 체질화가 되어야 합니다. 잠을 자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심지어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면서도 죄를 짓게 됩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6절입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절입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구원을 얻은 이후에 처음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또한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신 영적 지도자가 살아 있으면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구원 이후에 나를 인도한 인도자가 없을 때 그 때는 어둠이 강해질 때가 있습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절입니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딤낫 헤레스’는 ‘딤낫 세라’와 같은 지역으로 실로와 가까운 지역입니다.
10절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바알이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것인데 우리 안에 귀신이 섬기는 대상입니다. 내 안에 귀신인 바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게 합니다. 바알은 따로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게 하는 모든 것이 바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1, 2, 3, 4계명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데 이것을 못하게 합니다. 그게 바알입니다. 내가 하나님 이외에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바알입니다. 출세를 원하십니까? 바알입니다. 물질을 원하십니까? 바알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원하는 모든 것이 바알입니다. 내 안에 귀신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도록 부추깁니다. 인간은 대부분 나의 성공을 섬깁니다. 이게 바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내게 좋은 것이 오면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섬깁니다. 과학을 섬기고, 예술을 섬기고, 번영을 섬깁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힘들어 하고 마음 아파합니다. 바울은 정말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굉장히 은혜가 넘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사도로 인정하지도 않고 핍박했지만 영성이 뛰어납니다. 인간적으로는 최고로 비참했지만 영적으로는 최고로 은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섬기기 때문에 내가 잘 되어야 하고, 내가 잘 나야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야 합니다. 돈이 많이 벌어져야 하고 내 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게 다 바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과 악이 구별이 안 갑니다.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내면에 바알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을 섬기는 것보다 더 큰 게 있습니다 다음절입니다.
12절입니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절입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아스다롯은 에로스입니다. 표면적으로 바알을 풍요의 신이라고 한다면 아스다롯은 에로스입니다. 연예를 많이 하는 것이 에로스입니다. 바알의 어머니는 아세라이고, 아스다롯은 바알의 부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부요함과 음란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음란이 에로스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에로스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 남자들만 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가 없죠. 이 에로스의 배후에 음란이 있습니다. 에로스가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섬기게 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합니다. 결국은 구원을 상실하게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인데 솔로몬은 20년 동안 우상숭배에 빠지고 부요함과 형통과 에로스에 빠지게 됩니다. 나중에 간신히 다시 구원받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음란해집니다. 이 음란은 나이와 무관하게 하나님을 떠나면 다 음란하게 됩니다. 교회에 잘 다닌다 할지라도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성공을 중요시하고 부요를 축복하는데 다 바알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성공을 못 해도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다 세상 복을 추구하고 기도합니다. 육신의 질병을 낫고자 추구하는 것도 바알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고 마음으로는 바알을 섬깁니다. 원래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면 병이 안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애굽에서 있었던 모든 질병에 안 걸리게 하겠다’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바알과 아세라 신앙이 엘리야 때 엄청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850:1로 싸웁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입으로 말하고 믿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볼 때 바알이지 똑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내 욕심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미혹되는데 내가 원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서 돈 많이 벌고 잘 되는 것을 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 할까요? 하나님 한 분만을 원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도가 헌금한다고 하니 목사가 로또 당첨을 위해 중보해 준다고 하고 다 바알입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어도 바알 때문에 구원 상실이 오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대적을 이기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지게 해서 넘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는데 내 안에 귀신이 이기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구원받은 다음에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distress'가 생기는데 이게 뭘까요? 스트레스입니다. ’dis'는 두 배의 뜻인데 갑절의 스트레스를 의미합니다. 영적인 곤고함, 고통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영적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떠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면 영적인 고통이 따릅니다. 뭔가를 얻었는데 곤고합니다.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내면은 뭔가모를 고통이 따릅니다. 기쁘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부흥을 하고 명성을 얻어도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더 애를 쓰지만 더 곤고합니다. 이 곤고함은 죄에서 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 길이 없습니다. 1등을 해도 모든 것을 다 얻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바로 이 영적인 고통을 토로하는데 그래서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참된 만족을 얻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벗어나면 평생 곤고함으로 만족이 없습니다. 영이 곤고하면 다른 것에서 다 성공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맛보며 나아가야 하며 다른 곳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신 이유는 귀신이 역사할 때 내가 구원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사기는 귀신을 추방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귀신과 함께 머물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귀신 추방은 어렵고 잘 안 일어납니다. 귀신과 함께 살지만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정복하면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음행하며’ 음행은 실제 음행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마귀가 역사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이 역사하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음행합니다. 우상숭배 죄를 짓게 됩니다. 그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더러운 것이 땡기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깨끗하면 깨끗한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반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끼리끼리입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으면 유사 기독교가 좋아지고 미혹된 교회 목사가 존경스럽고 좋아지게 됩니다. 음행은 원어가 마귀와 즐기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다 예배의 형식이지만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가 아닌 다른 어둠이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참교회는 없어지고 마귀가 주관하는 예배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대환란입니다. 요즘 시대는 어릴 때부터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음란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내 안에 귀신이 활성화 됩니다. 그러면 참교회보다는 아닌 교회가 더 좋게 느껴집니다. 죄를 짓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죄에 빠지기 쉬운 구조입니다. 이름만 기독교이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음행죄에 빠지게 됩니다. 사시기 시대처럼 죄를 지적해도 회개하지 않고 반항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떠납니다. 과거에는 죄를 지적해 주면 권세자들을 어려워하고 순종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설교에서도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가 쌓이면 어둠과 결탁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과 결탁하게 되면 더더욱 죄를 사함받기 어렵습니다. 죄를 사함받는 것이 기본인데 교회에서조차 죄를 이기도록 도와주지 못하고 오히려 어두움에 있는 설교를 하게 되고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사사는 영혼들로 하여금 깨어나게 해서 자신의 영적인 죄 때문에 신음하고 괴롭게 만듭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에서 사람들이 듣기 좋게 웃음과 재미가 있는 감동이 있는 설교를 주로 합니다. 영적인 긴장은 전혀 하지 않고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예배 드릴 때 죄 때문에 처절하게 되고 못 견디게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암 4기인데 아파야 정상인데 너무 좋다고 기뻐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죄에 대한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19절입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문제가 있는데 세운 사사가 죽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배 인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인도자가 회개를 일으킬 정도가 되지 않으면 예배를 망치게 됩니다. 본인이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회개를 일으킬 정도의 영성가가 바로 부흥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도자가 죽은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진정한 부흥사가 다 죽고 복음주의가 나타나 회개없는 기독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세상 이슈나 지적인 설교만 해도 부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겁니다.
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절입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구원 받으면 귀신이 다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 이야기만 하면 다 이상하게 보는데 성경에 다 기록된 내용들입니다. 믿어도 귀신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 즉 귀신들을 쫓아내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나옵니다.
22절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귀신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는 이유가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신 때문에 죄를 짓고 약해지는데 회개를 통해서 한층 성숙하고 더 강해집니다. 물론 반복되지만 이것이 더 나은 겁니다. 세상 죄를 짓고, 마음의 죄도 짓지만 또 회개하고 회복합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귀신을 남겨 두신 이유가 매일 이 귀신과 싸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귀신은 내가 평생을 싸우고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현재 수많은 축사들이 가짜들이 많습니다. 예언에 근거해서 축사를 해야 하는데 귀신의 존재도 알지 못하면서 축사한다고 쑈를 합니다. 다 가짜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이 옵니다. ‘이러이러한 점을 회개하라. 이렇게 하라.’라고 위로부터 옵니다. 이것을 전달할 뿐입니다. 진정한 축사자는 귀신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이나 감동 없이 눈을 찌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입을 벌리라고 하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런다고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귀신과 싸울 때 때로는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싸우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튼튼하게 합니다. 나중에 사무엘상이 나오는데 그 때는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승리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열왕기 상에서는 드디어 귀신 추방이 일어납니다. 사사기는 아직 추방까지는 아니지만 귀신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나중에는 다윗처럼 쫓아내는 때가 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고 귀신과 싸우며 영이 성장하는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다보면 후에는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블레셋 귀신도 물리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블레셋은 일반 귀신이 아니라 원귀신을 의미하는데 이 원귀신조차 물리치는 급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이 원귀신까지 때려잡는 수준입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 골리앗을 이길 정도의 최고의 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사기를 잘 통과해야 합니다. 내 안의 영과 매일 싸우며 시험이 들 때도 있고 죄 가운데 빠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할 것 없습니다. 또 소리내어 부르짖고 나아가면 됩니다. 언제까지? 승리할 때까지입니다.내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면 결국은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둠과 싸울 때 낙심은 마귀의 전략입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패배할 때 또 울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잘 해 나가면 나중에는 영이 점점 커집니다. 나중에는 작은 어두움들은 쉽게 나갑니다. 이러한 싸움들을 누가 끝까지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다 길이 있고 코스가 있는데 이것을 이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렇게 긴 영적 싸움이 통과되면 나중에 선지자와 왕이 되는 단계가 옵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영생을 얻고 통치자로서의 삶을 살 때가 올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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